계획된 정의, 숨은 뒷거래 ..
1. 완벽한 타이밍
“여보,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김주희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받은 공지문을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하자보수 집단소송 참여 안내’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우리 아파트 외벽 누수 문제로 법무법인 대한에서 무료로 소송을 진행해준다는 거예요. 승소하면 수리비는 물론 위자료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남편 박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좋은 일이네. 어차피 우리도 베란다 누수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김주희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입주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런 본격적인 소송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법무법인에서 왜 무료로 이런 큰 사건을 맡겠다는 건가? 보통은 하자보수 기간 동안 건설회사와 협의부터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2. 설득하는 사람들
며칠 후, 아파트 부녀회장 최은숙이 김주희의 집을 방문했다.
“주희씨, 소송 참여 의사는 어떻게 되셨어요? 벌써 우리 동에서만 80% 이상 참여하기로 했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생각해보려고요.”
“무슨 생각을 더 해요? 공짜로 해주는 건데. 아, 그리고 참여하시면 소송 과정에서 불편함을 드리지 않도록 법무법인에서 매월 20만원씩 지원해준다고 하네요. 생활비 보조 개념이라고.”
김주희는 놀랐다. “돈까지 주신다고요?”
“네, 소송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입주민들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배려래요. 정말 좋은 분들이에요.”
3. 의심의 시작
김주희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변호사 이정호를 찾아갔다.
“이 변호사님, 이런 경우가 일반적인가요? 법무법인에서 무료로 소송해주고 돈까지 지원해준다는 게…”
이정호는 서류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법무법인 대한… 여기 대표변호사가 김대한인데, 이 사람 건설회사 법무 전문이에요. 특히 우리 아파트를 지은 태영건설과 자주 일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예요?”
“글쎄요…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뭔가 이상해요.”
4. 숨겨진 연결고리
이정호는 며칠 후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주희씨, 큰일이에요. 법무법인 대한의 김대한 대표변호사는 태영건설의 상임고문변호사였어요. 그리고 지금도 태영건설 계열사 여러 곳의 법적 업무를 맡고 있고요.”
“그럼 우리를 도와주는 변호사가 사실은 건설회사 편이라는 얘기예요?”
“더 심각한 건, 지금이 하자보수를 요구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는 점이에요. 입주 2년차니까 하자담보책임도 명확하고, 건설회사도 법적으로 응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소송 계획을 보면 절차가 복잡하게 되어 있어서 최소 2년은 걸릴 것 같아요.”
김주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소송하는 동안 시간만 끌다가 나중에는 하자보수 받기 어려워진다는 얘기네요?”
5. 완벽한 각본
이정호는 더 깊이 파헤쳤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입주 2년차는 하자보수의 골든타임이었다. 이 시기에 제대로 된 하자보수를 요구하면 태영건설은 법적으로 응해야 했고, 입주민들의 승소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하지만 집단소송으로 유도하여 의도적으로 실패시키면, 나중에 하자담보책임 기간이 지나고 나서 “이미 소송을 통해 해결하려 했지만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명분을 만들 수 있었다.
더욱 교묘한 것은 입주민들에게 지급하는 월 20만원이었다. 이것은 2년이라는 하자보수 최적 시기를 넘기게 하는 ‘시간 끌기’ 비용이었다. 소송이 길어지는 동안 하자담보책임 기간은 계속 흘러가고, 결국 태영건설의 법적 의무는 줄어들게 되는 구조였다.
6. 조용한 공모자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부녀회장 최은숙과 몇몇 입주민 대표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태영건설로부터 별도의 보상을 받기로 약속받았고, 다른 입주민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
“결국 우리는 제대로 된 하자보수를 받을 기회를 잃게 되는 거죠?”
이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합법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려워요.”
7. 선택의 기로
김주희는 밤새 고민했다. 주변 이웃들은 모두 소송에 참여하기로 했고, 자신만 빠진다면 왕따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월 20만원의 지원금도 솔깃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진실을 알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믿어줄까?
다음 날 아침, 김주희는 부녀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주희씨, 오늘까지 참여 의사를 밝혀주세요. 법무법인에서 최종 명단을 정리한대요.”
김주희는 수화기를 들고 망설였다.
8. 모든 것이 계획대로
2년 후, 소송은 복잡한 절차적 문제로 결국 취하됐다. 법무법인 대한은 “예상보다 법적 쟁점이 복잡해서 승소 가능성이 낮아졌다”며 소송 포기를 권했다. 그 사이 하자담보책임 기간의 대부분이 지나가 버렸다.
입주민들은 실망했지만, 그동안 받은 지원금이 있었고, 태영건설이 ‘선의’로 제안한 추가 위로금 50만원까지 받게 되었다.
“그래도 뭔가 받은 게 다행이에요.”
많은 입주민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총 530만원(월 20만원 × 24개월 + 위로금 50만원)은 입주 2년차에 정당한 하자보수를 받았다면 얻을 수 있었던 금액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하자담보책임 기간이 거의 만료되어 앞으로 제대로 된 보수를 받기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법무법인 대한은 ‘최선을 다했지만 법적 한계가 있었다’며 아쉬움을 표했고, 태영건설은 ‘법적 의무는 없지만 입주민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한다’며 좋은 이미지를 얻었다.
9. 완벽한 범죄
김주희는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된 것인지 깨달았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변호사는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건설회사는 의무 이상의 선의를 보였으며, 입주민들은 공정한 절차를 통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입주민들의 정당한 권리는 교묘한 조작을 통해 빼앗겼고, 그들은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받을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완벽한 기만. 피해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 과연 우리는 누구를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런 ‘기획된 정의’ 앞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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